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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설명

이스라엘의 역사


□ 팔레스타인의 통치자들
* 이슬람 제국(640-1099)
7세기 중엽 아라비아 반도의 이슬람은 그 세력을 페르시아에서 대서양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제국을 확장시켜 나갔다. 로마는 물러가고 이슬람이 팔레스타인의 새 주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던 자리는 이슬람 사원이 세워지고,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세웠던 교회는 파괴되거나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
초기 이슬람 시대의 팔레스타인 내의 많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에게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강요되었으며 이러한 이슬람이 20세기까지 팔레스타인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아직까지 팔레스타인에 남아있던 유대인의 대부분은 모슬렘의 박해가 심해지자 새로운 거처를 찾아 떠나고 소수의 유대인만이 남게 되었다.

* 십자군 (1099-1291)
이슬람의 통치 하에 있는 성지를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유럽의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을 차지하였다.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한 십자군은 모슬렘과 유대인을 학살하고 팔레스타인을 기독교의 성지로 회복시켜 나갔다. 일부 유대인은 모슬렘과 십자군에 대항하였으며 전쟁의 결과 대부분의 유대인 거주지는 파괴되었다.
12세기 후반이 되자 유대인 거주지는 악고, 가이사랴,. 아쉬켈론의 해안 도시에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항구가 있는 해안 도시는 상업과 무역으로 경제적인 회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십자군은 정치와 경제적 이득권 때문에 성지 탈환이라는 본래의 순수한 목적을 상실하여 가고 있었고, 이집트에 거점을 둔 모슬렘인 맘룩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여 십자군의 마지막 요새인 악고(Acco)를 손에 넣었다.

* 맘룩 (1291-1517)

맘룩은 악고, 욥바, 그리고 다른 해안 도시를 파괴하였고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은 국제적 무역로의 역할을 상실하면서 결과적으로 쇠퇴해 갔다. 예루살렘의 많은 지역도 황폐한 채로 남겨졌다. 1488년 예루살렘을 방문한 랍비 오바디야는 그의 여행기에 예루살렘의 4천 가구 중 유대인 70여 가구는 매우 빈곤한 상태였다고 기록했다. 팔레스타인은 아랍문화권에서도 별다른 중요성을 갖지 못하였으나 교육은 지속되었다. 십자군 시대의 교회는 파괴되고, 모슬렘 사원이 건설되었다. 15세기 악화된 경제 사정과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의 치안은 불안해졌다.

* 오스만 터키 (1517-1917)
오스만 터키의 술탄 셀림 1세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정복하여 팔레스타인의 새 주인이 되었다. 이미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비잔틴 제국을 약화시키고 험가리, 흑해연안과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의 페르시아만 북부 지역을 통합하여 거대한 이슬람 제국을 건설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은 터키 제국으로 이동해왔으며 일부는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다. 새로운 이민자로 유대인의 인구는 늘어났다.
16세기 예루살렘을 방문한 랍비는 그곳에 유대인 3백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17세기 말 예루살렘 내의 유대인은 1200명이었으나 18세기가 되자 천 여명의 새로운 이주자들이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당시 이들의 생활은 빈곤했고, 대부분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보내주는 기부금에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팔레스타인의 인구는 증가하여 전체 인구 45만 명 중에 유대인은 24,000명이었고 과반수 이상이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다. 터키는 이슬람 의 대 제국이라는 자만으로 유럽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나폴레옹의 이집트 점령에 자극을 받아 개혁을 서둘렀다. 그러나 내부의 반란과 외세의 침입이 계속되었고, 프랑스와 영국이 중동의 질서에 끼여들자 터키의 지위는 약화되고, 1917년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은 영국으로 넘어간다.

□ 팔레스타인 밖의 유대인

* 4세기에서 9세기까지의 유럽의 유대인

유대인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통치 하에서 살게 되었다. 기독교는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이유로 박해했고, 모슬렘은 모하메드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여기지 않고 코란도 인정하디 않는 유대인을 박해했다. 유대인에 대한 이슬람의 태도는 기독교인보다 관대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고난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럽에 정착한 유대인과 이슬람 세계에 정착한 유대인은 두 세계를 왕래하며 무역에 종사하였다. 이들 유대상인 중 일부는 궁정과 연결 되어 상류층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고 유대인 무역상이 지방 무역에 개입하자, 봉건 영주는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유대인 무역상을 활용하였다. 화폐가 중요성을 더 할수록 유대인의 활동은 도시 경제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8세기 초 아랍이 스페인을 공격하고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자 스페인의 유대인은 약 3백년 간 자유롭게 시, 철학, 과학뿐 아니라 유대교를 발달시킬 수 있는 전성기를 누렸다. 이슬람 세계에 살던 유대인은 아랍 문화를 유럽에 전해주는 매개 역할을 했다.

* 중세의 유대인

십자군은 유대인을 핍박하고 그들의 거주지를 파괴시켰다. 무역과 농업에 종사하던 이들은 생계 유지를 위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토지가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대금업(貸金業)이었다.
1492년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유대인은 개종을 강요당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당했다. 개종한 유대인 중에는 비밀리에 유대 전통을 유지하기도 했다. 추방당한 이들은 그리스, 북아프리카, 오스만 제국 내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16세기 유럽은 유대인을 격리시키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1516년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유대인을 게토(Ghetto)라는 구역에 격리시킨다. 16세기에 도시의 유대인 인구가 늘어나자 추가로 구역이 할당되었으며 같은 이름이 주어졌다. 이리하여 게토는 유대인이 강제로 살게 되는 격리 구역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중세 말 게 토는 유럽에서 공식적인 기구가 되어, 유대인은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에 직면했다. 그러나 주변 세계와 단절된 게토에서 유대인은 자유롭게 토라연구에 열중할 수 있었고, 자체적인 교육을 통하여 정체성을 지켜 나갔다. 한편으로 게토는 유대인의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

* 유대교 사상의 발전과 사상가들
이슬람 시대에는 가온(Gaon)이라 불리는 지도자들에 의해서 탈무드 연구가 부활되었으며 바벨론의 수라와 품베디타는 탈무드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교적인 문제 뿐 아니라 세속적인 모든 문제는 가온이 제시하는 지도에 의존하며, 바벨론의 가온이 그 역할을 상실하자 이집트, 스페인, 독일의 탈무드 학자들이 이 책임을 맡게 된다.
스페인 출신의 이븐 가비롤(Solomon Ibn Gabirol c. 1021-1056)은 네오플라톤 철학자로 d대인의 지식영역을 베벨론에서 유럽으로 옮겨놓았다. 그는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에 자극을 받아 철학적인 시를 구상해 냈고 이러한 시의 일부는 유대인의 기도문에 포함되었다.
마이모니테스(Moses ben Maimon 1135-1204)는 율법을 집대성한 저서를 집필하였고 그의 철학은 기독교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출신으로 성경과 탈무드 주석의 대가인 라쉬(Rabbi Solomon Yitzhaki 1040-1105)는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과 바벨론의 전통을 이어주었다.
이슬람이 스페인을 정복하면서 유대인을 관대하게 하자 유대인은 자유롭게 철학과 사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 계몽주의(하스칼라)
유대인의 계몽주의는 중세의 금욕주의와 관념론에서 유대인을 해방시키는 휴머니즘을 이상으로 하여 18세기와 19세기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계몽주의는 17세기 서구화된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유대인 사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나 18세기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역사, 철학, 과학의 습득은 유대인의 지식영역을 넓혀주었다. 독일에서는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5-1786)의 노력으로 계몽주의가 싹트게 되었는데, 그는 게토의 벽안에 갇혀있던 유대인을 세속적인 유럽 세계로 이끌어 내었다. 계몽주의는 전통에 묶여있던 유대인들에 게 주변의 세계와 융합하며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였으며 시온주의를 낳게 하였다.


퍼온 곳 : "키부츠에 가면 세계가 보인다" (손예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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